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나와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나라가 일제 치하에서 해방된 1945년.정명석 선생은 그해 3월,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의 첩첩산중 월명동에서, 부모슬하 6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지독스런 가난을 겪었다. 변변한 땅이 없어 농사를 지어도 거둘 곡식이 적었다. 멀건 죽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게 다반사였고 낮에는 칡뿌리를 캐러 산으로 다녔다. 초등학생 시절 점심시간이면 학교운동장 수돗물로 배를 채우기도 했다.
가혹한 현실이 거듭되면서 선생은 십대 초반부터 인생고민에 휩싸였다. ‘하나님은 왜 인생을 창조하셨을까?’
성자주님의 신부되어 사랑했다
15살부터 산 기도를 했다. 힘겨운 삶이 깨우쳐 준 인생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낮에는 부모를 도와 농사일을, 밤이면 대둔산과 폐광에 들어가 성경을 읽고 또 읽으며 기도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태11:28-30) 이 말씀을 묵상하던 나날, 성자주님이 선생 앞에 나타났다. 기절 할 듯 기뻤다. 주님은 “인생 문제를 해결하려면 내게 배워라” 하셨다. 그때부터 더욱 기도에 전념하며 주님께 성경을 하나하나 배우기 시작했다.
선생은 성자주님만을 신랑으로 삼고 사랑했다.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한 신부의 극진한 사랑으로 사랑했다. 어떤 역경에도 주님을 먼저 불렀고 자신을 비워 그의 말씀에 순종했다.
선생의 선생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라
여름에 시작한 입산기도는 겨울이 지날 무렵 끝나기도 했다. 몇 날 며칠을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기도하기 일쑤였다. 하나님의 심정과 사랑의 한(恨)을 깨닫고 흘린 눈물은 일주일이 넘게 쉬지 않고 흘려도 그치질 않았다.
1966년, 백마부대 일원으로 베트남전에 3년 여간 참전했다. 선생은 성경을 늘 몸에 지니고 다니며 틈만 나면 읽었고, 하늘의 음성과 묵시를 기록했다.
수십 번의 극적인 죽음의 찰나에서 주님의 보호로 기적적으로 살았다. 전쟁의 비극적 참상을 보고 겪으면서 생명의 귀함을 절절히 깨달았다.
귀국 후에도 수도생활은 연속됐다. 40일 금식기도와 70일의 절식기도를 했다. 천 번을 넘게 읽은 성경들은 너널 너덜 해졌다. 몸서리치는 추위와 더위, 잠 못 자는 고통과 배고픔, 외로움을 견디며 선생은 성경의 비밀과 진리를 연속 배워나갔다. 눈물과 고생이 앞을 가려도 주님을 열렬히 사랑했기에 모든 고통을 감내하며 위로할 수 있었다. 설한풍 생화송의, 기나긴 20여 년의 수도생활이었다.
그리고 성자는 선생에게 영계의 곳곳을 보여주었다. 천국과 지옥도 셀 수 없이 다녔다. 인간이 자기 영혼에 대해 모르고 영원한 세계를 몰라 허탄한 삶을 사는 걸 깨닫고 선생은 가슴을 치며 개탄했다.
주님은 “너는 내게 배우고 선생의 선생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라”고 당부하셨다.
나의 유일한 스승은 성자였다
남녀노소, 시골 도시 할 것 없이 복음을 전했다. 어느 해는 전도한 사람을 세어보니 만여 명이 넘었다. 주님과 함께 발이 부르트도록 생명을 구원하면서 하나님의 말 못할 슬픈 심정과 눈물 그리고 한(限)을 더욱 깊이 체감했다. 1978년 6월 1일,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상경했다. 이때부터 주님께 배운 말씀들을 엮어 본격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선생은 말한다. “나의 절대신 오직 한 분 성자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사랑하니 그로 나타나 가르쳐주었다. 그분만을 신랑으로 모시며 마음과 뜻과 목숨 바쳐 사랑했고, 성자의 첫 신부가 되었다. 그래서 이 길만을 달려왔다”고.